한국에서 71년간 사목활동을 펼쳐 최장 기록을 세운 두봉 주교가 2025년 4월 11일 선종했다. 초대 안동교구장을 지낸 그는 2022년 1월 tvN의 인기 프로그램 ‘유퀴즈 온 더 블럭’에도 출연해 천주교 신자와 인근 주민은 물론 일반 국민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두봉 주교는 1929년 9월 2일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르네 뒤퐁으로 5남매 중 둘째였다. 작은아버지와 두 사촌까지 모두 열 식구가 한 집에 복작거리며 살았다. 아버지가 1차대전 때 말라리아에 걸리는 바람에 온 식구가 농사에 매달려야 했고, 두봉 주교만 빼놓고 모두 초등학교밖에 못 다녔다.
고등학교 3학년 철학 수업 시간에 배운 예수의 말씀과 인격에 반해 천주교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오를레앙신학교 2학년 때 군에 입대했다가 동료 부대원을 통해 알게 된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로마 그레고리안신학대를 졸업한 뒤 1953년 사제품을 받고 한국에 파송됐다.
한국 땅을 밟은 것은 1954년 12월이었다. 서울 용산의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를 거쳐 대전교구 대흥동성당 보좌신부로 사목 활동을 시작했다. 본명 뒤퐁과 비슷한 발음의 한자를 따 한국식 이름도 지었다. 중국 시인 두보(杜甫)의 성에 한자로 봉우리 봉(峰)자를 썼다. 두견새도 같은 두(杜) 자를 써서 두봉 주교는 자기 이름을 “산봉우리에서 노래하는 두견새”라고 풀이했다.
그때는 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해야 했다. 두봉 주교는 그런 가운데서도 남을 배려하는 한국인의 따뜻한 심성을 발견하고 희망을 품었다. 조치원읍에 황무지를 구해 신자들과 함께 논으로 개간하고,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창립해 청소년들에게 일자리를 주선해주는 등 12년 동안 대전에서 활동했다. 1956년 개업한 성심당과 손잡고 어려운 사람에게 빵을 전해주기도 했다.
1967년부터는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을 맡았다가 1969년 5월 29일 경북 북부를 관할하는 초대 안동교구장에 임명되면서 7월 25일 주교로 승품됐다. 두봉 주교는 한국의 명절 풍습과 이 지역에 강하게 남아 있는 유교 전통을 적극 수용하며 주민과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1973년 마련한 새 건물도 종교를 떠나 지역 주민과 함께하겠다는 뜻으로 가톨릭회관 대신 문화회관이라고 이름지었다.
학교도 세웠다. 안동에 이미 개신교 계통의 일반 중고등학교가 있는 데다 당장 필요한 건 실업교육이라고 판단해 1970년 상지여자실업고등전문학교로 출발했다. 상지여자전문학교와 상지실업전문대 등을 거쳐 1998년 가톨릭상지대로 교명을 바꿨다. 1970년에는 상지여중, 1972년에는 상지여자상업고등학교도 설립했다. 지금의 상지미래경영고등학교다.
1973년에는 경북 영주에 다미안의원을 열었다. 당시 한센병 환자들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편견 때문에 심각한 차별과 냉대를 받고 있었다. 직접 모금 운동에 나서고 지역 신도들과 협력해 교육과 재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장애인을 위한 직업훈련원도 개설했다.
지역 주민의 대부분이 농민이어서 농민 사목에도 힘썼다. 교구 창설과 함께 가톨릭농민회 안동지부를 만들어 농업 기술과 권리 의식 함양을 위한 교육, 협동조합 운영을 통한 경제적 자립 지원, 불합리한 농업 정책 개선 운동 등을 펼쳤다. 그러나 이 일로 추방될 위기를 겪었다.
1978년 영양군이 농가 소득 증대에 도움이 된다며 감자 재배를 권했는데, 나눠준 씨감자가 불량이었던 것이 발단이었다. 농민들의 항의를 묵살하자 가톨릭농민회와 안동교구 사제단까지 나서 일부 보상을 받아냈다. 그러나 가톨릭농민회 영양군 청기분회장 오원춘이 이때의 경험을 알리는 강연을 하다가 1979년 5월 경찰에게 납치돼 폭행을 당했다.
안동교구 사제들은 ‘짓밟히는 농민운동’이란 문건을 제작해 배포하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언론에 폭로했다. 경찰은 허위사실이라고 주장하며 정호경 신부와 가톨릭농민회 간부들을 구속했다. 이를 보고 분개한 시민들까지 합세해 반정부 투쟁으로 번져갔다. 서울 명동대성당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성당에서는 시국 기도회가 열렸다.
당초 두봉 주교는 “외국인 신부는 도와주는 역할만 해야 한다”면서 안동교구장 제의를 사양하다가 교황청 뜻을 거스르지 못해 딱 10년만 맡겠다고 했다. 1979년 봄에는 교황청에 사임을 청원하는 편지도 보냈다. 그런데 오원춘 사건이 터지자 그만둘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박정희 정권이 추방 명령을 내리자 교황청까지 나서 철회를 요구했다. 그러던 중 10·26 사태로 박 대통령이 숨지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긴급조치를 해제해 오원춘과 신부 등이 풀려났다.
그 뒤로도 두봉 주교는 안동교구장을 11년이나 더 맡았다. 1990년 사임한 뒤 후임 교구장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경기도 고양시의 행주공소에서 지내다가 안동교구의 권유로 의성군 봉양면에 거처를 마련했다. 이 지역엔 성당이 없어 두봉천주교회란 간판을 내걸고 성당 겸 주민 사랑방으로 활용했다.
그는 프랑스 나폴레옹훈장을 비롯해 만해실천대상, 올해의 이민자상, 백남인권봉사상 등을 받았다. 2019년에는 특별귀화로 한국 국적을 얻어 호적에 봉양 두씨라고 올렸다. 올 4월 6일 뇌경색으로 쓰러져 경북 안동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나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예천군 농은수련원에 있는 안동교구 성직자 묘원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