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블레이즈델

1950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탈환환 서울 거리에는 버려진 고아들이 넘쳐났다. 미군 제5공군사령부 군목(軍牧)으로 참전한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은 이 비참한 광경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동료 군목 월레스 울버튼 대령과 함께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원생이 늘어나자 그의 부관 멀 스트랭 하사도 합류해 수용 시설을 새로 지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1천 명을 넘어섰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은 급변해 서울을 버리고 후퇴해야 했다. 블레이즈델 중령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원생들을 피란시킬 수단을 백방으로 알아보다가 12월 16일 군 관계자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배편을 마련했다.

트럭 한 대에 아이들을 10여 차례씩 번갈아 태우며 3일 만에 인천항에 도착했다. 이들을 기다린 것은 100명도 탈 수 없는 작고 낡은 배였다. 오는 도중 원생 8명은 독감과 백일해로 숨졌다. 블레이즈델 중령은 서울에서 우연히 만난 제5공군 작전참모 터너 로저스 대령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그는 “마침 미국에서 출발해 일본 오키나와 기지에 도착한 C-54 수송기 16대를 보낼 테니 이튿날 아침 8시까지 김포공항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오라”고 말했다. 실낱같은 희망이 생기긴 했지만 아이들을 이동시킬 방법이 막막했다. 공군 수송부에 요청하자 “부대 이동에 모두 동원돼 차량이 없다”며 거절했다.

이튿날 아침 미군 해병대 트럭 14대가 시멘트를 실어 나르기 위해 인천항에 나타났다. 블레이즈델 중령은 상부의 명령이라고 둘러대며 “모든 작업을 중지하고 김포공항까지 아이들을 태워 옮기라”고 지시했다. 약속 시간보다 2시간이나 늦게 도착했으나 다행히 수송기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12월 20일 미 공군 수송기 16대는 고아 1천59명을 태우고 무사히 제주공항에 착륙했다. 이들은 황온순 여사가 운영하는 한국보육원에 수용됐다. 이 일을 두고 미국 언론은 ‘유모차 공수작전(The Kiddy Car Airlift)’이라고 불렀다. 3일 뒤 미군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피란민 1만4천여 명을 구출한 ‘흥남 철수작전’과 함께 한국전쟁의 양대 크리스마스 기적으로 꼽힌다.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블레이즈델 중령은 명령 불복종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재판장이 군법을 위반한 이유를 묻자 그는 “누군가 반드시 그 일을 해야만 했다”라며 “내 임무가 죽음에 내몰린 아이들을 죽게 놓아두는 것이라면 곧바로 전역하겠다”고 대답했다. 재판장은 정상을 참작해 처벌하지 않았다.

‘유모차 공수작전’은 할리우드 영화에도 등장했다. 록 허드슨 주연의 1957년 작 ‘전송가(戰頌歌·Battle Hymn)’는 목사 출신 파일럿인 헤스 대령의 동명 자서전을 스크린에 옮긴 것으로 같은 해 국도극장에서도 개봉했다. 그러나 헤스 대령이 ‘유모차 공수작전’의 주역인 것처럼 묘사돼 논란을 빚었다. 그는 고아들을 피란시킬 방법을 알아보고 이들이 제주에 내렸을 때 임시 거처인 제주농고로 안내하는 등 도움을 주는 데 그쳤을 뿐이다.

블레이즈델 중령과 함께 고아들을 이송하는 데 힘쓴 마이크 스트랭 하사가 “왜 항의하지 않느냐”고 묻자 블레이즈델 중령은 “우리의 목표는 고아들을 구하는 것이었고 목표를 이뤘다”면서 “어떤 일은 돈이나 명예로 따질 수 없는 보상이 따른다”고 담담히 말했다.

‘유모차 공수작전’으로 한국판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이란 별칭을 얻은 블레이즈델 중령은 1910년 9월 4일 미국 미네소타주 헤이필드에서 태어났다. 매칼레스터대와 매코믹신학교를 거쳐 목사 안수를 받은 뒤 1940년 7월 미국 육군항공대에 입대해 군목이 됐다. 알래스카·필리핀·오키나와 등지에 주둔하며 2차대전에도 참전했다. 한국전이 발발하자 제5공군에 배속돼 대구로 파견됐다가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서울로 왔다.

그는 장병들의 신앙생활을 이끄는 군목 본연의 임무보다는 고아를 돌보는 일에 더 매달렸다. 이기붕 서울시장에게 부탁해 초등학교 건물을 빌린 뒤 차로 서울 거리를 돌며 고아들을 데려와 길렀다. 식량과 의복을 구하느라 온종일 뛰어다니자 그의 정성에 감복한 군 장병들이 월급을 쪼개 후원금을 보탰고 자원봉사자도 모여들었다.

블레이즈델 중령은 1951년 한국을 떠난 뒤 일본과 리비아에서도 근무했으며 1964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이후 목회 활동을 하며 1966년부터 1977년까지 뉴욕주 사회복지부 대표를 맡기도 했다. 2001년 방한해 황온순 여사와 재회하고 그가 구한 고아 출신들을 만났다.

그는 2007년 하늘의 부름을 받고 네바다주 볼더시티 재향군인 묘지에 안장됐다. 광주광역시의 보육원 충현원은 2008년 그의 회고록 한국판을 펴내고 이듬해 동상도 세웠다. 블레이즈델 목사는 한국전 당시 이곳에서 고아들을 돌본 미군 참전용사 조지 드레이크 박사와의 인연으로 충현원을 알게 됐다. 건물이 낡아 아이들을 키우기 힘들다는 딱한 사연을 듣고 회고록 판권과 영화 제작권을 충현원에 기증한다고 유언했다. 정부는 지난해 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