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재활용은 ‘착한 기업’의 선택지로 여겨졌다. 정부와 자율협약을 맺고 포장재를 회수하거나, 재활용 시범사업을 추진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생산자책임제도(EPR, Extended Producer Responsibility)**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다. 법률이 보장하는 의무이며, 국가 자원순환정책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았다.

2003년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 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으로 도입된 EPR 제도는, 기업이 생산 단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폐기 이후의 회수·재활용 책임까지 지도록 한 장치다. 포장재(플라스틱, 종이팩, 유리병), 전기·전자제품, 타이어, 윤활유 등 다양한 품목이 대상이다. 이제 생산자는 단순히 물건을 팔고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제품이 사회로부터 어떻게 ‘퇴장’하는가까지 책임져야 한다.

의무제도의 무게

자율협약 시절과 달리 지금은 강제력이 작동한다. 환경부는 매년 품목별 재활용 의무량을 고시한다. 기업은 직접 회수·재활용하거나, 재활용공제조합에 분담금을 납부해 간접 이행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이행하지 않을 경우 과징금과 부담금, 행정처분이 뒤따른다. 이는 곧 ‘환경은 비용이 아니라 의무’라는 사회적 합의를 제도화한 것이다.

변화하는 패러다임

최근 제도는 단순히 재활용률을 높이는 수준을 넘어섰다. 포장재의 구조 개선을 강제하는 ‘재활용 용이성 등급 표시 의무화(2020년)’는 대표적인 사례다. 더 가볍게, 더 단순하게, 더 분해 가능하게—생산자가 제품 설계 단계에서부터 친환경을 고민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구조가 된 것이다.

나아가 앞으로의 EPR은 감량·재사용·탄소저감까지 의무의 범위를 확장할 전망이다. 이는 순환경제와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향한 불가피한 진화다.

결론: 기업의 생존전략이 된 EPR

생산자책임제도가 자율에서 의무로, 다시 강화된 의무로 발전하는 흐름은 단순한 규제의 강화가 아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무이자, 동시에 생존전략이다. 탄소중립 시대, ‘책임을 다하는 기업’만이 소비자와 시장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

이제 EPR은 더 이상 ‘정부의 잣대’가 아니라, 기업의 미래전략을 가늠하는 시험지다.